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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 영 시인 [ 출처: wikia ] |
국어 교재 속 시(詩) 단원 말미에 김수영이란 시인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함께 그의 시 '풀'이 실려 있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 '풀' 중에서
그런데 난 이 '풀'이란 시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에서 느끼는 감흥이 이 '풀'이란 시에는 없었다.
오히려 이 관념덩어리의 시를 교재에 왜 실어놨는지, 또 이 시를 쓴 시인이 우리 문학계 대표적 참여시인이라는데 뭐가 그리 대단한 시인이라는 건지 수긍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우연히 시 한 편을 접하게 됐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비켜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인의 시였다.
그제서야 학창시절 품었던 오래된 의문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 김수영이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구나!'
김수영과 그의 시 '풀'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산문 한 편을 더 읽어본다.
형, 나는 형이 지금 얼만큼 변했는지 모르지만 역시 나의 머릿속에 있는 형은 누구보다도 시를 잘 알고 있는 형이오. 나는 아직까지도 <시를 안다는 것>보다도 더 큰 재산을 모르오. 시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러니까 우리들끼리라면 <통일> 같은 것도 아무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오. 사실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 (중략)
그러나 형, 내가 형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자체부터가 벌써 어쩌면 현실에 뒤떨어진 증거인지도 모르겠소. 지금 이쪽의 젊은 학생들은 바로 시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들이 실천하는 시가 우리가 논의하는 시보다도 암만해도 먼저 앞서갈 것 같소. 그렇지만 나는 요즈음처럼 뒤따라가는 영광을 느껴본 일도 또 없을 것이오. 나는 쿠바를 부러워하지 않소. 비록 4월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도 쿠바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쿠바에는 <카스트로>가 한 사람 있지만 이남에는 2,000명에 가까운 더 젊은 강력한 <카스트로>가 있기 때문이오.
- 저 하늘 열릴 때 ―김병욱(金秉旭) 형에게 _김수영 (1960) 중에서 [출처: kimsoo0.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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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 시의 진가를 발견하는데 그의 시를 처음 접한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무지와 게으름의 탓이 크겠지만 그때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밑줄 치고 받아쓰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수업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더라면 나는 좀 더 일찍 김수영의 시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 같은 부류의 다른 학생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