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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2016년 9월 10일 토요일
2016년 6월 3일 금요일
나는 일베 조각상 파손을 환영한다
일베 조각상을 파손했다는 대학생 이야기에 통쾌한 감정을 금할 길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오뎅탕' 운운하며 비인간적으로 희롱했던 몰상식한 '일베'였다. 그 '일베'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한 개인의 예술창작의 자유로 용인될 수 있을 만큼 우리사회가 정의롭거나 민주적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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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제주강정 해군기지,
쌍용차 해고 노동자,
용산참사,
배우 장자연,
밀양 송전탑,
세월호 침몰,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 등등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시민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그리고 인권이 짓밟혀
생겨난 아픔과 상처가 우리 사회에 너무 많다.
부정하고 탐욕스런 수구세력과 재벌의 논리가 판을 치고 피해자들의 호소와 민주시민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가두는 비열한 언론권력이 우리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회 환경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오뎅탕' 운운하며 비인간적으로 희롱했던 몰상식한 '일베'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한 미대생이 일베를 상징하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학교는 그 조각상을 사람들이 오가며 볼 수 있는 정문에 설치했다. 중국관광객들이 조각상의 손가락 모양을 흉내내며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논란이 되자 조각상의 작가인 미대생은 일베에 대한 옹호도 비판도 아닌 작품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나로서는 이해가 명확하게 안되는 모호한 설명이다. '작품의 훼손행위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조각상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일베조각상이 파손됐고 한 유명 논객이 이 문제를 거론했다. 언론권력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정치권력의 부패와 재벌의 불법·비리를 제대로 처벌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우리 사회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자유로운 사회라면
난 이 일베조각상 문제를 한 미대생의 예술 표현의 권리로 인정해 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남의 눈치 안보고 내 정치적 입장을 당당하게 밝히기 어려운 사회, 정치이슈를 풍자·희화화 하는 코미디언조차 고소·고발로 재갈을 물리는 사회에서 일베조각상 문제는 단순히 예술·표현의 권리로 보호받을 순 없다고 본다.
생각해 보라.
만약 어느 예술가가 박정희의 친일반민족 행위와 독재 반민주 역사를 풍자하거나 이명박의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위산업 비리) 문제를 희화화해서 비판하는 조형물을 설치한다면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이것에 어떻게 반응할까?
[사진=한겨레신문] |
이유는 간단하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오뎅탕' 운운하며 비인간적으로 희롱했던 몰상식한 '일베'였다. 그 '일베'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한 개인의 예술창작의 자유로 용인될 수 있을 만큼 우리사회가 정의롭거나 민주적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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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제주강정 해군기지,
쌍용차 해고 노동자,
용산참사,
배우 장자연,
밀양 송전탑,
세월호 침몰,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 등등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시민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그리고 인권이 짓밟혀
생겨난 아픔과 상처가 우리 사회에 너무 많다.
부정하고 탐욕스런 수구세력과 재벌의 논리가 판을 치고 피해자들의 호소와 민주시민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가두는 비열한 언론권력이 우리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회 환경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오뎅탕' 운운하며 비인간적으로 희롱했던 몰상식한 '일베'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한 미대생이 일베를 상징하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학교는 그 조각상을 사람들이 오가며 볼 수 있는 정문에 설치했다. 중국관광객들이 조각상의 손가락 모양을 흉내내며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논란이 되자 조각상의 작가인 미대생은 일베에 대한 옹호도 비판도 아닌 작품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나로서는 이해가 명확하게 안되는 모호한 설명이다. '작품의 훼손행위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조각상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일베조각상이 파손됐고 한 유명 논객이 이 문제를 거론했다. 언론권력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정치권력의 부패와 재벌의 불법·비리를 제대로 처벌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우리 사회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자유로운 사회라면
난 이 일베조각상 문제를 한 미대생의 예술 표현의 권리로 인정해 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남의 눈치 안보고 내 정치적 입장을 당당하게 밝히기 어려운 사회, 정치이슈를 풍자·희화화 하는 코미디언조차 고소·고발로 재갈을 물리는 사회에서 일베조각상 문제는 단순히 예술·표현의 권리로 보호받을 순 없다고 본다.
생각해 보라.
만약 어느 예술가가 박정희의 친일반민족 행위와 독재 반민주 역사를 풍자하거나 이명박의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위산업 비리) 문제를 희화화해서 비판하는 조형물을 설치한다면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이것에 어떻게 반응할까?
2016년 5월 22일 일요일
「달고나」와 「뽑기」
TV를 보면 자꾸 '뽑기'를 '달고나'라고 부른다.
출연하는 연예인도 그렇고 화면에 붙이는 자막도 그렇다.
그러나 TV에서 말하는 '달고나'는 틀린 말이다.
그들이 '달고나'라고 말하는 것은 '뽑기'다.
나도 어릴적 설탕을 불에 달군 국자에 녹여 소다를 섞어 만든 것을 '뽑기'라고 불렀다.
우리 누나는 내가 먹어보지 못한 '달고나'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테레비가 나서서 '뽑기'를 '달고나'라고 잘못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우리 말과 글을 엉망진창으로 함부로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이것을 가리키는 말을 저것이라 가르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 테레비뿐이랴!
다행히 구글검색으로 '뽐뿌게시판'에서 이런 잘못을 바로 잡는 글을 찾았다. ☞
뽑기는 윗 사진처럼 설탕을 국자에 녹여 소다를 섞어서 만드는 황색의 과자구요...
달고나는 아랫 사진처럼 하얀색 각설탕 비스무리 한걸 국자에 녹여 먹던거 아니었나요? 돌사탕이라고 부르기도 했구요.
소다를 섞지도 않고, 부풀지도 않습니다.
70년대생 서울 토박이인데, 저희 시절에는 둘은 분명 확실히 구분되었고, 다르게 호칭되었습니다.
이게 어느 샌가 달고나=뽑기가 되어버린 듯 하군요..
사진 출처는 두산백과인데, 일단 두산백과에는 제가 기억하는 것처럼 정의되어 있네요.
【출처】 뽐뿌:자유게시판 - 뽑기와 달고나는 다른 거 아닌가요??? → 원문 바로가기
출연하는 연예인도 그렇고 화면에 붙이는 자막도 그렇다.
그러나 TV에서 말하는 '달고나'는 틀린 말이다.
그들이 '달고나'라고 말하는 것은 '뽑기'다.
나도 어릴적 설탕을 불에 달군 국자에 녹여 소다를 섞어 만든 것을 '뽑기'라고 불렀다.
우리 누나는 내가 먹어보지 못한 '달고나'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테레비가 나서서 '뽑기'를 '달고나'라고 잘못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우리 말과 글을 엉망진창으로 함부로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이것을 가리키는 말을 저것이라 가르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 테레비뿐이랴!
다행히 구글검색으로 '뽐뿌게시판'에서 이런 잘못을 바로 잡는 글을 찾았다. ☞
달고나는 아랫 사진처럼 하얀색 각설탕 비스무리 한걸 국자에 녹여 먹던거 아니었나요? 돌사탕이라고 부르기도 했구요.
소다를 섞지도 않고, 부풀지도 않습니다.
70년대생 서울 토박이인데, 저희 시절에는 둘은 분명 확실히 구분되었고, 다르게 호칭되었습니다.
이게 어느 샌가 달고나=뽑기가 되어버린 듯 하군요..
사진 출처는 두산백과인데, 일단 두산백과에는 제가 기억하는 것처럼 정의되어 있네요.
【출처】 뽐뿌:자유게시판 - 뽑기와 달고나는 다른 거 아닌가요??? → 원문 바로가기
2016년 4월 8일 금요일
한국사회 투표권의 문제점
20대 국회의원 선거인 4·13총선이 앞으로 5일 남았다.
그런데 내 투표권(선거권)은 과연 민주주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① 1/5짜리 투표권 (겨우 15.67%만 확실하다.)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 정당투표는 투표율만큼 의회 의석수를 배분한다.
그런데 20대 국회의 비례대표 의석수는 19대에 비해 7석이 줄어들었다.
헌법재판소의 현행 선거구 위헌판결에 따라 여야가 선거구 획정을 논의했지만
밍기적거리며 지지부진하던 끝에 결국엔 비례대표 의석을 줄이는 것으로 결론 내버렸다.
거대 양당 정치구도가 낳은 비극이었다.
국회의원 정원 300명 중 47명의 비례대표는 1/5이 조금 넘는다.
민의를 고스란히 반영한 의원 선출이 겨우 15.67%에 불과한 것이다.
② 한 번의 1등이 다 가진다.
나머지 253명의 국회의원은 지역구 선거를 통해 뽑는다.
한 번의 선거에서 득표 수 1등을 차지하면 국회의원 당선자가 되는 방식이다.
만약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다면 내 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이른바 '사표'가 된다.
이는 심각한 민의의 왜곡을 낳는다.
당장 19대 국회의원 선거만 보더라도 제1당인 새누리당이 득표율보다 거의 10%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민심이 투표로 보여준 정치권력 구도를 실제 정치권이 왜곡해 나눠갖고 있는 셈이다.
③ 시민의 직접민주주의와 진보정당의 성장을 싫어한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 인간의 권리와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려면 시민들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필요하다.
사회의 공익을 위한 책임과 의무를 가진 공인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과 토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시위와 집회 등이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공인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를 명예훼손이나 불법낙선운동으로 제약한다.
다양한 시위와 집회가 공공질서를 해치는 과격 폭력 범죄로 처벌되거나 불법선거운동으로 낙인 찍힌다.
진보정당들이 넘어야 할 제도적 장벽도 크다.
선거에서 일정 지지율 이상을 받지 못하면 정당 등록을 취소하거나 그 당명을 다시 써서 재창당하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해 놓았다.
그나마 소수 진보정당들이 헌법소원 심판 등의 지난한 노력으로 위헌판결을 받아냈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정당활동은 녹록치 않다. (참조: 한겨레신문, “정당 취소조항 위헌” 녹색당 등 당명 유지)
이들이 정치선거를 치르려면 적잖은 돈을 기탁금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내야한다. (공직선거법 56조, ex-국회의원 후보 1500만원, 대통령 후보 3억원)
득표 수가 많은 제1당과 2당이야 당선·낙선에 상관없이 기탁금을 돌려받지만, 지지율이 매우 낮은 소수 진보정당 후보들은 다음 선거에서 또 다시 목돈의 기탁금을 마련해야 한다.
선거를 치를수록 경제적 부담으로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결국엔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은 미우나 고우나 1번 아니면 2번을 두고 고민해야 하는 선거판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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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져야 한다.
우리가 '헬조선(Hell Joseon)'이라 불리우는 사회에 사는 건 부패한 정권의 강대한 힘과 야당의 무능함만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의 힘이 아직 약하다는 게 아닐까?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 정권이 이토록 국민을 개무시하고 야만적인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민이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민주당이 이렇게까지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시민이 우스워 보이기 때문이다.
수십년의 독재와 파시즘 문화에 길들여져 약육강식의 제도와 체제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에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투표권(선거권)은 과연 민주주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 |
[사진=중앙선관위, 레이더P] |
① 1/5짜리 투표권 (겨우 15.67%만 확실하다.)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 정당투표는 투표율만큼 의회 의석수를 배분한다.
그런데 20대 국회의 비례대표 의석수는 19대에 비해 7석이 줄어들었다.
헌법재판소의 현행 선거구 위헌판결에 따라 여야가 선거구 획정을 논의했지만
밍기적거리며 지지부진하던 끝에 결국엔 비례대표 의석을 줄이는 것으로 결론 내버렸다.
거대 양당 정치구도가 낳은 비극이었다.
국회의원 정원 300명 중 47명의 비례대표는 1/5이 조금 넘는다.
민의를 고스란히 반영한 의원 선출이 겨우 15.67%에 불과한 것이다.
② 한 번의 1등이 다 가진다.
나머지 253명의 국회의원은 지역구 선거를 통해 뽑는다.
한 번의 선거에서 득표 수 1등을 차지하면 국회의원 당선자가 되는 방식이다.
만약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다면 내 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이른바 '사표'가 된다.
이는 심각한 민의의 왜곡을 낳는다.
당장 19대 국회의원 선거만 보더라도 제1당인 새누리당이 득표율보다 거의 10%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민심이 투표로 보여준 정치권력 구도를 실제 정치권이 왜곡해 나눠갖고 있는 셈이다.
![]() |
참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비례대표제포럼 |
③ 시민의 직접민주주의와 진보정당의 성장을 싫어한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 인간의 권리와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려면 시민들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필요하다.
사회의 공익을 위한 책임과 의무를 가진 공인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과 토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시위와 집회 등이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공인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를 명예훼손이나 불법낙선운동으로 제약한다.
다양한 시위와 집회가 공공질서를 해치는 과격 폭력 범죄로 처벌되거나 불법선거운동으로 낙인 찍힌다.
진보정당들이 넘어야 할 제도적 장벽도 크다.
선거에서 일정 지지율 이상을 받지 못하면 정당 등록을 취소하거나 그 당명을 다시 써서 재창당하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해 놓았다.
그나마 소수 진보정당들이 헌법소원 심판 등의 지난한 노력으로 위헌판결을 받아냈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정당활동은 녹록치 않다. (참조: 한겨레신문, “정당 취소조항 위헌” 녹색당 등 당명 유지)
이들이 정치선거를 치르려면 적잖은 돈을 기탁금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내야한다. (공직선거법 56조, ex-국회의원 후보 1500만원, 대통령 후보 3억원)
득표 수가 많은 제1당과 2당이야 당선·낙선에 상관없이 기탁금을 돌려받지만, 지지율이 매우 낮은 소수 진보정당 후보들은 다음 선거에서 또 다시 목돈의 기탁금을 마련해야 한다.
선거를 치를수록 경제적 부담으로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결국엔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은 미우나 고우나 1번 아니면 2번을 두고 고민해야 하는 선거판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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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져야 한다.
우리가 '헬조선(Hell Joseon)'이라 불리우는 사회에 사는 건 부패한 정권의 강대한 힘과 야당의 무능함만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의 힘이 아직 약하다는 게 아닐까?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 정권이 이토록 국민을 개무시하고 야만적인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민이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민주당이 이렇게까지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시민이 우스워 보이기 때문이다.
수십년의 독재와 파시즘 문화에 길들여져 약육강식의 제도와 체제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에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요지부동과 부동층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4·13 총선을 앞두고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바꿔 쓰면 좋겠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말이다.
반면에 요지부동(搖之不動)이란 말이 있다.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이 때문에 부동층(浮動層)이란 말을 부동층(不動層)으로 오해하기 쉽다.
우리 사회 20~40%의 새누리당 절대지지층을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부르는데,
오히려 '새누리 부동층(不動層)'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의미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한자말을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부동층(浮動層)을 유동층, 무당파층 등으로 고쳐 쓰면 굳이 한자를 병용해 표기하지 않더라도 의미파악을 쉽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치가 시민의 생활을 쉽고 편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듯이
우리의 말글살이 또한 시민의 언어생활을 쉽고 편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
사진: 한겨레신문 |
2016년 3월 10일 목요일
너희가 김수영을 아느냐?
내가 '김수영'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게 고등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어 교재 속 시(詩) 단원 말미에 김수영이란 시인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함께 그의 시 '풀'이 실려 있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 '풀' 중에서
그런데 난 이 '풀'이란 시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에서 느끼는 감흥이 이 '풀'이란 시에는 없었다.
오히려 이 관념덩어리의 시를 교재에 왜 실어놨는지, 또 이 시를 쓴 시인이 우리 문학계 대표적 참여시인이라는데 뭐가 그리 대단한 시인이라는 건지 수긍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우연히 시 한 편을 접하게 됐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비켜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인의 시였다.
그제서야 학창시절 품었던 오래된 의문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 김수영이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구나!'
김수영과 그의 시 '풀'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산문 한 편을 더 읽어본다.
형, 나는 형이 지금 얼만큼 변했는지 모르지만 역시 나의 머릿속에 있는 형은 누구보다도 시를 잘 알고 있는 형이오. 나는 아직까지도 <시를 안다는 것>보다도 더 큰 재산을 모르오. 시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러니까 우리들끼리라면 <통일> 같은 것도 아무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오. 사실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 (중략)
그러나 형, 내가 형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자체부터가 벌써 어쩌면 현실에 뒤떨어진 증거인지도 모르겠소. 지금 이쪽의 젊은 학생들은 바로 시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들이 실천하는 시가 우리가 논의하는 시보다도 암만해도 먼저 앞서갈 것 같소. 그렇지만 나는 요즈음처럼 뒤따라가는 영광을 느껴본 일도 또 없을 것이오. 나는 쿠바를 부러워하지 않소. 비록 4월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도 쿠바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쿠바에는 <카스트로>가 한 사람 있지만 이남에는 2,000명에 가까운 더 젊은 강력한 <카스트로>가 있기 때문이오.
- 저 하늘 열릴 때 ―김병욱(金秉旭) 형에게 _김수영 (1960) 중에서 [출처: kimsoo0.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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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 시의 진가를 발견하는데 그의 시를 처음 접한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무지와 게으름의 탓이 크겠지만 그때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밑줄 치고 받아쓰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수업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더라면 나는 좀 더 일찍 김수영의 시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 같은 부류의 다른 학생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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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 영 시인 [ 출처: wikia ] |
국어 교재 속 시(詩) 단원 말미에 김수영이란 시인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함께 그의 시 '풀'이 실려 있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 '풀' 중에서
그런데 난 이 '풀'이란 시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에서 느끼는 감흥이 이 '풀'이란 시에는 없었다.
오히려 이 관념덩어리의 시를 교재에 왜 실어놨는지, 또 이 시를 쓴 시인이 우리 문학계 대표적 참여시인이라는데 뭐가 그리 대단한 시인이라는 건지 수긍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우연히 시 한 편을 접하게 됐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비켜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인의 시였다.
그제서야 학창시절 품었던 오래된 의문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 김수영이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구나!'
김수영과 그의 시 '풀'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산문 한 편을 더 읽어본다.
형, 나는 형이 지금 얼만큼 변했는지 모르지만 역시 나의 머릿속에 있는 형은 누구보다도 시를 잘 알고 있는 형이오. 나는 아직까지도 <시를 안다는 것>보다도 더 큰 재산을 모르오. 시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러니까 우리들끼리라면 <통일> 같은 것도 아무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오. 사실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 (중략)
그러나 형, 내가 형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자체부터가 벌써 어쩌면 현실에 뒤떨어진 증거인지도 모르겠소. 지금 이쪽의 젊은 학생들은 바로 시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들이 실천하는 시가 우리가 논의하는 시보다도 암만해도 먼저 앞서갈 것 같소. 그렇지만 나는 요즈음처럼 뒤따라가는 영광을 느껴본 일도 또 없을 것이오. 나는 쿠바를 부러워하지 않소. 비록 4월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도 쿠바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쿠바에는 <카스트로>가 한 사람 있지만 이남에는 2,000명에 가까운 더 젊은 강력한 <카스트로>가 있기 때문이오.
- 저 하늘 열릴 때 ―김병욱(金秉旭) 형에게 _김수영 (1960) 중에서 [출처: kimsoo0.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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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 시의 진가를 발견하는데 그의 시를 처음 접한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무지와 게으름의 탓이 크겠지만 그때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밑줄 치고 받아쓰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수업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더라면 나는 좀 더 일찍 김수영의 시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 같은 부류의 다른 학생들도...
국민, 시민, 민중 그리고 인민
국민, 시민, 민중, 인민... 이 낱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본질적으로는 의미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 국민 = 시민, 민중, 인민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낱말들은 질곡(桎梏)의 우리 근·현대사처럼 여기저기 상처입고 고통받아 쓰임에 차이가 생기거나 경계와 금기의 주홍글씨가 새겨지기도 했다.
게다가 가장 안타까운 일은 이 중에서 언중들에게 제일 많이 사랑받아야 할 낱말이 제일 심한 천대를 받고 도리어 제일 쓰지 말아야 할 낱말이 우리 말과 글에 제일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할까?
1. 국민 (國民)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 -네이버 사전
네 개의 낱말 중 우리 사회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글 바로쓰기 교육을 하셨던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이 '국민'을 일제잔재로 보았다.
(1996년 김영삼 정부가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고친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일본 식민지 지배 시절에 사용했던 '황국신민(皇國臣民)'에서 비롯한 말이라는 것이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이란 왕이 다스리는 나라인 제국주의 일본에서 신하된 입장으로 천황을 섬기며 사는 백성이란 뜻이다.
현대사회에서 자기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시민과는 거리가 먼 피지배계층을 의미하는 셈이다.
다른 지적도 있다.
국가의 구성원을 의미하는 국민은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 인간에 앞서 국가가 전제되고 우선시 되는 개념으로 일종의 국가주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유진오의 회고록 중에서
<출처: 장정일, ‘신민의 시대’를 기억하라, 시사인 제378호, 2014.12.16>
2. 시민(市民)
① 그 시(市)에 사는 사람.
② <역사> 서울 백각전(百各廛)의 상인들.
③ [같은 말] 공민(公民)(2. 지방 자치 단체의 주민 가운데 일정한 자격 요건을 구비하고 그 자치 단체의 공무(公務)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 -네이버 사전
시민(市民, citizen)은 우리 사회에서 서울시민, 강남구민, 경기도민 식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어느 행정구역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시민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가진 주체를 말한다. 즉, 사전에서 풀이한 공민(公民)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을 잘 표현해 주는 말로, 그 사회가 국가라면 국민이 곧 시민이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이런 의미의 '시민'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수식인 '민주시민'이란 말이 그렇고 어릴적 세계사 시간에 배운 '시민혁명'이란 말이 그렇다.(민주시민, 시민혁명이 행정구역에 따라 민주군민이나 도민혁명이 되진 않는다.)
또 미국사회에서 쓰는 '시민권'이란 용어도 그렇다. '영주권'과 구별하여 사회구성원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한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가 이를 가리켜 '국민권'이라 말하지 않는다.)
3. 민중(民衆)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이른다. [비슷한 말] 민서. -네이버 사전
'인민대중'의 줄임말로 우리 사회의 수구세력 일부가 '민중(民衆)'이란 낱말에 대해 마치 어떤 부정적인 정치색을 띤 용어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사실 사전에 나온 것처럼 그냥 사회구성원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알기론 우리 사회가 '인민'이란 낱말을 금기시하면서부터 그 말을 대신해 썼고 80,90년대에 들어서 문학계가 민중문학이란 개념을 사용한 것처럼 민중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가리키는 뜻으로 그 의미가 더 좁아진 진 것으로 안다.
4. 인민(人民)
①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대체로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를 이른다. [비슷한 말] 민인.
② <법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인. -네이버 사전
'인민'은 'people'이란 뜻으로 존재 그 자체로서 자격이 되는 본연의 인간 다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인민이다.)
우리사회가 '인민'이란 말을 '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인민은행' 같은 쓰임에서 보듯이 무슨 '빨갱이' 용어 쯤으로 치부하지만 이는 냉전적 사고방식을 가진 우리 사회 다수가 지닌 큰 착각에 불과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3년에 실시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구절이 있듯이, 본디 ‘인민’이라는 용어는 민주주의의 주체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중략)...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에 인민이라는 용어를 백성이란 뜻으로 쓴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에도 대한민국에서 인민이란 단어를 쓴 바가 있으나 정식 용어로 골라지지 않았다. -위키백과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표한 최초헌법 '대한민국임시헌장'에도 우리 사회구성원의 범주를 가리켜 분명하게 '인민'이라 칭하고 있다. (더불어 법령에는 당시 우리 민족의 이천만 동포를 '국민'으로, 정치적 권리를 가진 인민을 '공민'이란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길지 않아 법령 전문을 싣는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시행 1919.4.11.] [임시정부법령 제1호, 1919.4.11., 제정]
제0조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야 한성에 기의한지 삼십유일에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자손려민에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선 서 문
존경하고 경애하는 아이천만 동포 국민이여, 민국 원년 삼월일일 아 대한민족이 독립선언함으로부터 남과 여와 노와 소와 모든 계급과 모든 종파를 물론하고 일치코 단결하야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하게 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한지라 금에 세계의 동정이 흡연히 아 집중하였도다. 차시를 당하야 본정부일전국민의 위임을 수하야 조직되었나니 본정부일전국민으로 더불어 전심코 육력하야 임시헌법과 국제도덕의 명하는바를 준수하야 국토 광복과 방기확고의 대사명을 과하기를 자에 선언하노라. 국민 동포이여 분기할지어다. 우리의 유하는 일적의 혈이 자손만대의 자유와 복락의 가이요. 신의 국의 건설의 귀한 기초이니라. 우리의 인도일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할지요. 우리의 정의일마침내 일본의 폭력을 승할지니 동포여 기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지어다.
정 강
1. 민족평등 국가평등 급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
3. 일절 정치범인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일의함.
5. 절대독립을 서도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하는 자는 적으로 인함.
대한민국 원년 사월 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절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급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유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 병역의 의무가 유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 급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 신체형 급 공창제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후 만일개년내에 국회를 소집함.
사실 본질적으로는 의미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 국민 = 시민, 민중, 인민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낱말들은 질곡(桎梏)의 우리 근·현대사처럼 여기저기 상처입고 고통받아 쓰임에 차이가 생기거나 경계와 금기의 주홍글씨가 새겨지기도 했다.
게다가 가장 안타까운 일은 이 중에서 언중들에게 제일 많이 사랑받아야 할 낱말이 제일 심한 천대를 받고 도리어 제일 쓰지 말아야 할 낱말이 우리 말과 글에 제일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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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한 시민들 모습 (2016.02.27) [출처: 트위터] |
1. 국민 (國民)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 -네이버 사전
네 개의 낱말 중 우리 사회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글 바로쓰기 교육을 하셨던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이 '국민'을 일제잔재로 보았다.
(1996년 김영삼 정부가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고친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일본 식민지 지배 시절에 사용했던 '황국신민(皇國臣民)'에서 비롯한 말이라는 것이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이란 왕이 다스리는 나라인 제국주의 일본에서 신하된 입장으로 천황을 섬기며 사는 백성이란 뜻이다.
현대사회에서 자기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시민과는 거리가 먼 피지배계층을 의미하는 셈이다.
다른 지적도 있다.
국가의 구성원을 의미하는 국민은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 인간에 앞서 국가가 전제되고 우선시 되는 개념으로 일종의 국가주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유진오의 회고록 중에서
<출처: 장정일, ‘신민의 시대’를 기억하라, 시사인 제378호, 2014.12.16>
2. 시민(市民)
① 그 시(市)에 사는 사람.
② <역사> 서울 백각전(百各廛)의 상인들.
③ [같은 말] 공민(公民)(2. 지방 자치 단체의 주민 가운데 일정한 자격 요건을 구비하고 그 자치 단체의 공무(公務)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 -네이버 사전
시민(市民, citizen)은 우리 사회에서 서울시민, 강남구민, 경기도민 식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어느 행정구역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시민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가진 주체를 말한다. 즉, 사전에서 풀이한 공민(公民)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을 잘 표현해 주는 말로, 그 사회가 국가라면 국민이 곧 시민이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이런 의미의 '시민'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수식인 '민주시민'이란 말이 그렇고 어릴적 세계사 시간에 배운 '시민혁명'이란 말이 그렇다.(민주시민, 시민혁명이 행정구역에 따라 민주군민이나 도민혁명이 되진 않는다.)
또 미국사회에서 쓰는 '시민권'이란 용어도 그렇다. '영주권'과 구별하여 사회구성원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한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가 이를 가리켜 '국민권'이라 말하지 않는다.)
3. 민중(民衆)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이른다. [비슷한 말] 민서. -네이버 사전
'인민대중'의 줄임말로 우리 사회의 수구세력 일부가 '민중(民衆)'이란 낱말에 대해 마치 어떤 부정적인 정치색을 띤 용어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사실 사전에 나온 것처럼 그냥 사회구성원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알기론 우리 사회가 '인민'이란 낱말을 금기시하면서부터 그 말을 대신해 썼고 80,90년대에 들어서 문학계가 민중문학이란 개념을 사용한 것처럼 민중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가리키는 뜻으로 그 의미가 더 좁아진 진 것으로 안다.
4. 인민(人民)
①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대체로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를 이른다. [비슷한 말] 민인.
② <법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인. -네이버 사전
'인민'은 'people'이란 뜻으로 존재 그 자체로서 자격이 되는 본연의 인간 다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인민이다.)
우리사회가 '인민'이란 말을 '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인민은행' 같은 쓰임에서 보듯이 무슨 '빨갱이' 용어 쯤으로 치부하지만 이는 냉전적 사고방식을 가진 우리 사회 다수가 지닌 큰 착각에 불과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3년에 실시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구절이 있듯이, 본디 ‘인민’이라는 용어는 민주주의의 주체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중략)...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에 인민이라는 용어를 백성이란 뜻으로 쓴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에도 대한민국에서 인민이란 단어를 쓴 바가 있으나 정식 용어로 골라지지 않았다. -위키백과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표한 최초헌법 '대한민국임시헌장'에도 우리 사회구성원의 범주를 가리켜 분명하게 '인민'이라 칭하고 있다. (더불어 법령에는 당시 우리 민족의 이천만 동포를 '국민'으로, 정치적 권리를 가진 인민을 '공민'이란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길지 않아 법령 전문을 싣는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시행 1919.4.11.] [임시정부법령 제1호, 1919.4.11., 제정]
제0조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야 한성에 기의한지 삼십유일에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자손려민에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선 서 문
존경하고 경애하는 아이천만 동포 국민이여, 민국 원년 삼월일일 아 대한민족이 독립선언함으로부터 남과 여와 노와 소와 모든 계급과 모든 종파를 물론하고 일치코 단결하야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하게 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한지라 금에 세계의 동정이 흡연히 아 집중하였도다. 차시를 당하야 본정부일전국민의 위임을 수하야 조직되었나니 본정부일전국민으로 더불어 전심코 육력하야 임시헌법과 국제도덕의 명하는바를 준수하야 국토 광복과 방기확고의 대사명을 과하기를 자에 선언하노라. 국민 동포이여 분기할지어다. 우리의 유하는 일적의 혈이 자손만대의 자유와 복락의 가이요. 신의 국의 건설의 귀한 기초이니라. 우리의 인도일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할지요. 우리의 정의일마침내 일본의 폭력을 승할지니 동포여 기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지어다.
정 강
1. 민족평등 국가평등 급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
3. 일절 정치범인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일의함.
5. 절대독립을 서도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하는 자는 적으로 인함.
대한민국 원년 사월 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절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급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유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 병역의 의무가 유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 급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 신체형 급 공창제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후 만일개년내에 국회를 소집함.
2016년 3월 9일 수요일
'푸르다'와 '파랗다'
'푸르다'는 무슨 색을 가리키는 낱말일까?
우리는 하늘, 산, 바다의 빛깔을 모두 '푸르다'란 말을 써서 사용한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라고 말할 때 '푸르다'는 파란색을 뜻한다. ☞ 창공(蒼空), 창해(蒼海)
그런데 푸른 산이라고 말하면 '푸르다'는 녹색, 초록색을 의미한다. ☞ 청산(靑山)
엄연히 다른 두가지 색을 '푸르다'란 낱말의 의미로 모두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쓰임이 괜찮은 걸까?
색깔을 나타내는 다른 말을 보자.
'빨갛다'는 말의 뜻을 분홍색과 섞어 쓰지 않는다.
'노랗다', '파랗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뜻을 각각 주황색이나 보라색과 섞어 쓰지 않는다.
유독 '푸르다'만 전혀 다른 색깔인 파란색과 초록색의 뜻을 섞어 쓰고 있다.
원래 '푸르다'는 초록색의 의미를 가진 말이었는데 일부 지식인들과 출판인쇄물에서 파란색의 의미로 잘못 쓰면서 이런 오용이 굳어졌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설득력있게 들린다.
말의 효용면에서도 이런 의미의 혼란은 정리할 필요가 있다.
파란색은 '파랗다'로, 초록색·녹색은 '푸르다'로 쓰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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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으로 시작하는 동요가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바닷물 빛깔이 이 동요에서처럼 초록빛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 때에는 '푸른 바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푸르다'란 낱말의 의미로 '파랑'과 '초록'을 모두 쓰는 정당성의 근거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바닷물이 녹색으로 보이는 것은 빛의 산란에 의한 자연현상일뿐, 우리가 관념으로 인지하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바다는 '파란 바다'이지, '초록색'을 뜻하는 '푸른 바다'가 될 순 없다.
우리는 하늘, 산, 바다의 빛깔을 모두 '푸르다'란 말을 써서 사용한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라고 말할 때 '푸르다'는 파란색을 뜻한다. ☞ 창공(蒼空), 창해(蒼海)
그런데 푸른 산이라고 말하면 '푸르다'는 녹색, 초록색을 의미한다. ☞ 청산(靑山)
엄연히 다른 두가지 색을 '푸르다'란 낱말의 의미로 모두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쓰임이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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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
색깔을 나타내는 다른 말을 보자.
'빨갛다'는 말의 뜻을 분홍색과 섞어 쓰지 않는다.
'노랗다', '파랗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뜻을 각각 주황색이나 보라색과 섞어 쓰지 않는다.
유독 '푸르다'만 전혀 다른 색깔인 파란색과 초록색의 뜻을 섞어 쓰고 있다.
원래 '푸르다'는 초록색의 의미를 가진 말이었는데 일부 지식인들과 출판인쇄물에서 파란색의 의미로 잘못 쓰면서 이런 오용이 굳어졌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설득력있게 들린다.
말의 효용면에서도 이런 의미의 혼란은 정리할 필요가 있다.
파란색은 '파랗다'로, 초록색·녹색은 '푸르다'로 쓰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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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파란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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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 푸른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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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으로 시작하는 동요가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바닷물 빛깔이 이 동요에서처럼 초록빛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 때에는 '푸른 바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푸르다'란 낱말의 의미로 '파랑'과 '초록'을 모두 쓰는 정당성의 근거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바닷물이 녹색으로 보이는 것은 빛의 산란에 의한 자연현상일뿐, 우리가 관념으로 인지하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바다는 '파란 바다'이지, '초록색'을 뜻하는 '푸른 바다'가 될 순 없다.
2016년 2월 29일 월요일
감색, 곤색 그리고 군청색
지난 토요일 관심 깊게 읽은 한겨레신문 기사가 있다.
이인수 총장의 수원대 사학비리에 관한 연재기사인데 기사내용이 우리 주류사회의 추악한 민낯을 다루는 좋은 기사여서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다.
그런데 기사본문 중에 단어 하나가 눈에 거슬린다.
"이인수(64) 총장은 감색 양복 차림으로 재판 예정 시간보다 10분 일찍 법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총장이 입고 법원에 갔다는 양복의 색깔인 '감색'이란 어떤 색일까?
※ 군청색? 아니면 '짙은·진한 쪽빛' 같은 말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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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보기 "한겨레신문" |
이인수 총장의 수원대 사학비리에 관한 연재기사인데 기사내용이 우리 주류사회의 추악한 민낯을 다루는 좋은 기사여서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다.
그런데 기사본문 중에 단어 하나가 눈에 거슬린다.
"이인수(64) 총장은 감색 양복 차림으로 재판 예정 시간보다 10분 일찍 법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총장이 입고 법원에 갔다는 양복의 색깔인 '감색'이란 어떤 색일까?
인터넷 구글Google을 통해 적당한 사진을 검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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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색 양복 |
내 어릴적 어른들이 '곤색'이라고 부른 색깔이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왕자표 크레파스'를 쓰던 그때 아이들은 이 색깔을 '군청색'으로도 불렀다.)
그럼 '곤색'이 어떻게 '감색'이 됐을까? 곤색의 '곤-'은 일본말 'こんいろ(紺色)'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의 한자인 '紺色'을 우리발음으로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감색'이다.
그러나 '곤색, 군청색'을 가리켜 '감색'이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감'은 '감나무의 열매'를 말한다.
나만 하더라도 '감색'이란 말을 평소에 잘 쓰지 않을뿐더러 과일 '감'의 주홍색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어른이 되어 '감색'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난 이 말이 어릴적부터 나한테 익숙했던 '곤색, 군청색'을 가리키는 낱말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의미의 혼동을 줄 수 있는 일본식 한자말 '감색'을 대신해 많은 사람들이 쉽고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고운 우리말로 바꿔 사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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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 |
2016년 2월 27일 토요일
꽃이 꼬시 아니다
TV를 보다보면 방송 출연자들의 잘못된 발음이 귀에 거슬릴 때가 종종 있다.
생각나는 몇 가지가 이런 경우다.
① "솥에 물이 없어." → [ 소세 ]
② "꽃이 많이 피었네." → [ 꼬시 ]
③ "여기 무릎에 앉아봐." → [ 무르베 ]
모두가 잘못된 발음이다.
'솥, 꽃, 무릎'은 원래 한글표기 대로 [ 솥 ], [ 꽃 ], [ 무릎 ]으로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말의 쓰임에 따라 발음이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①* 솥(鼎, caldron): 솥 [ 솓 ], 솥이 [ 소치 ], 솥에 [ 소테 ], 솥을 [ 소틀 ], 솥만 [ 손만 ]
②* 꽃(花, flower): 꽃 [ 꼳 ], 꽃이 [ 꼬치 ], 꽃에 [ 꼬체 ], 꽃을 [ 꼬츨 ], 꽃만 [ 꼰만 ]
③* 무릎(膝, knee): 무릎 [ 무릅 ], 무릎이 [ 무르피 ], 무릎에 [ 무르페 ], 무릎을 [ 무르플 ], 무릎만 [ 무름만 ]
이러한 변화는 발음을 쉽게 하려는 경향 등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일어난다. (이것을 학교에서는 끝소리규칙, 구개음화, 유성음화 등 국어의 음운규칙으로 배운다.)
그러나 TV 속 방송 출연자들의 언어에는 '솥에', '꽃이', '무릎에'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말 발음의 오용 사례가 빈번하다. TV가 우리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심히 걱정할만한 수준이다.
(☞ 여기서 잠깐!!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인 한글은 말소리를 소리나는 대로 온전히 적을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음소문자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우리말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은 한글맞춤법에 따라 '소리대로 적되 그 말의 본 모양을 밝혀' 적는 원칙을 적용한다.)
한 예를 더 들어보자.
우리나라 유명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 멤버인 '헨리'의 이름을 많은 이들이 [헨니]라고 부른다. 캐나다 화교인 그의 본명이 Henry Lau라고 하니 그를 Henry[ Henri ]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TV에서 대부분의 동료 출연자들이 그를 [ Henri ]가 아닌 [ 헨니 ]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Henry가 아닌 우리 글자로 된 '헨리'는 [ 헨니 ]라고 발음하는 게 적절치 않다. [ 헬리 ]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
우리가 '문리(文理)'라는 말을 [ 문니 ]가 아닌 [ 물리 ]라고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리(分離)', '윤리(倫理)'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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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겨울, 누나의 부탁으로 고3 수험생이던 조카에게 국어 문법에 대한 특별과외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생각한 것이 있다.
국어 문법이란 평소 자신이 늘 사용하는 모국어인 한국어의 구조와 원리, 규칙들을 정리해 모아놓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언어의 질서와 규칙을 이해하는 일이 왜 아이들에게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것을 배우는 공부가 되었을까?
입시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란하고 혼탁한 언어환경, 즉 일본식 한자말과 외국어의 남용, 인터넷 은어와 비속어의 범람, 잘못된 우리말 신조어의 출현 같은 문제들 역시 아이들로 하여금 우리말글을 공부하는데 큰 해를 끼쳤을지 모른다.
TV 출연자들이 잘못된 발음으로 이야길 하고 글을 읽는 현상도 여기에 맥이 닿아있다고 본다. 일상의 삶에서 사회의 문란한 언어환경에 계속 노출되고 있는데도 실제 언어생활과 언어규범의 간극을 메우는 그 어떤 공교육이나 사회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불러온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아이들이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
생각나는 몇 가지가 이런 경우다.
① "솥에 물이 없어." → [ 소세 ]
② "꽃이 많이 피었네." → [ 꼬시 ]
③ "여기 무릎에 앉아봐." → [ 무르베 ]
모두가 잘못된 발음이다.
'솥, 꽃, 무릎'은 원래 한글표기 대로 [ 솥 ], [ 꽃 ], [ 무릎 ]으로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말의 쓰임에 따라 발음이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①* 솥(鼎, caldron): 솥 [ 솓 ], 솥이 [ 소치 ], 솥에 [ 소테 ], 솥을 [ 소틀 ], 솥만 [ 손만 ]
②* 꽃(花, flower): 꽃 [ 꼳 ], 꽃이 [ 꼬치 ], 꽃에 [ 꼬체 ], 꽃을 [ 꼬츨 ], 꽃만 [ 꼰만 ]
③* 무릎(膝, knee): 무릎 [ 무릅 ], 무릎이 [ 무르피 ], 무릎에 [ 무르페 ], 무릎을 [ 무르플 ], 무릎만 [ 무름만 ]
이러한 변화는 발음을 쉽게 하려는 경향 등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일어난다. (이것을 학교에서는 끝소리규칙, 구개음화, 유성음화 등 국어의 음운규칙으로 배운다.)
그러나 TV 속 방송 출연자들의 언어에는 '솥에', '꽃이', '무릎에'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말 발음의 오용 사례가 빈번하다. TV가 우리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심히 걱정할만한 수준이다.
(☞ 여기서 잠깐!!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인 한글은 말소리를 소리나는 대로 온전히 적을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음소문자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우리말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은 한글맞춤법에 따라 '소리대로 적되 그 말의 본 모양을 밝혀' 적는 원칙을 적용한다.)
한 예를 더 들어보자.
우리나라 유명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 멤버인 '헨리'의 이름을 많은 이들이 [헨니]라고 부른다. 캐나다 화교인 그의 본명이 Henry Lau라고 하니 그를 Henry[ Henri ]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상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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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주니어 헨리 (Henry Lau) |
우리가 '문리(文理)'라는 말을 [ 문니 ]가 아닌 [ 물리 ]라고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리(分離)', '윤리(倫理)'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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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겨울, 누나의 부탁으로 고3 수험생이던 조카에게 국어 문법에 대한 특별과외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생각한 것이 있다.
국어 문법이란 평소 자신이 늘 사용하는 모국어인 한국어의 구조와 원리, 규칙들을 정리해 모아놓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언어의 질서와 규칙을 이해하는 일이 왜 아이들에게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것을 배우는 공부가 되었을까?
입시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란하고 혼탁한 언어환경, 즉 일본식 한자말과 외국어의 남용, 인터넷 은어와 비속어의 범람, 잘못된 우리말 신조어의 출현 같은 문제들 역시 아이들로 하여금 우리말글을 공부하는데 큰 해를 끼쳤을지 모른다.
TV 출연자들이 잘못된 발음으로 이야길 하고 글을 읽는 현상도 여기에 맥이 닿아있다고 본다. 일상의 삶에서 사회의 문란한 언어환경에 계속 노출되고 있는데도 실제 언어생활과 언어규범의 간극을 메우는 그 어떤 공교육이나 사회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불러온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아이들이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
2016년 2월 24일 수요일
'개새끼'는 강아지가 아니다
‘개새끼’란 욕에 나오는 개는 ‘개(犬)’가 아니다.
여기서 쓰는 ‘개-’는 ‘쓸모없는, 보잘
것 없는’이란 뜻으로 문법적 명칭은 접사다. ‘개새끼’, ‘개소리’, ‘개쓰레기’ 같은
단어에서 쓰는 ‘개-’는 쓸모없다는 뜻이다. ‘개떡’, ‘개폼 잡다’에서는
볼품 없거나 보잘 것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팟캐스트를 듣다보니 이를 ‘개(犬)’로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식견의 깊고 얕음을 떠나 매한가지다. 나라꼴이
엉망진창이다보니 그 사회의 언어교육조차 이 모양 이 꼴인가 보다.
제발 국어사전을 뒤져봐라. 인터넷에서도 자판 몇 번 두들기면 그 뜻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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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날: 2015년 12월 20일
출처: medium. Dec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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