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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6일 수요일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

【출처】 PIXABAY

사내는 아침부터 노인네가 내어놓은 이불 빨래를 세탁기에 돌린다. 사내는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비가 내린 뒤라 큰 빨래를 해야 하는 일이 영 탐탁치 않다.

한참이 지나 빨래가 끝난 이불을 꺼내 건조대에 널고 보니 며칠 전 세탁기에 돌렸던 빨래들이 온데 간데 없다. 달랑 사내의 팬티 한 장 뿐이다. 노인네는 동생이 제 방으로 거둬갔다는데 의심스럽다. 사내의 수건과 양말을 찾아야 한다. 동생 방으로 가본다. 동생은 한창 자고 있다. 다시 거실로 나와 노인네에게 자세히 묻는다.

결국 노인네가 제 가방에서 사내의 연두색 수건을 꺼낸다. 얼마전 노인네가 사내의 수건을 엉뚱한 곳(?)에 쓰는 바람에 새로 산 수건이다. 사내의 양말도 같이 나온다. 사내는 표정이 굳어진다.

사내는 묵묵히 노인네 밥을 준비한다. 두부조림과 김치 약간을 얹은 두 숟갈의 밥에 참기름을 뿌린다. 곁에는 달걀 프라이 하나를 접시에 담는다. 마실 물을 데워주려고 노인네가 쓰는 물잔을 찾으니 소반에는 안 보인다. 노인네 물잔이 거실 방바닥 요강 옆에 나란히 서 있다. 사내는 더 심란해진다.

그래도 사내의 할일은 계속된다. 동네 마트에서 새로 사온 두부와 참치로 두부조림을 만들고 밥을 새로 안친다. 그런데 이번엔 더러운 식탁이 눈에 들어온다. 치우지 않은 김칫국물과 먹다 흘린 반찬찌꺼기가 식탁에 그대로 말라붙어 있다. 동생 짓이다.

사내는 속으로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참다 못한 사내는 집을 나왔다. 천원짜리 달달한 쵸코바라도 하나 먹어야 화나고 답답한 속이 조금이라도 풀릴 거 같다.

밖은 비가 와서 하늘이 흐렸지만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걷힌 공기는 달고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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